멀고 먼 '실질적' 낙태죄 폐지, 4가지 숙제 남았다
| ▲ 낙태죄 반대를 외치던 시위자들이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 소식을 듣고 환호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관련사진보기 |
지난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을 66년 만에 '헌법불합치'로 결정한 데 따라 여성들은 마침내 '낙태죄 그 이후'를 고민해볼 수 있게 됐다.
낙태죄는 2020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만 낙태죄가 폐지된다고 해도 당장 달라지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모자보건법을 비롯한 관련 법, 임신중절 관련 보건 의료 제도, 이성 관계를 무조건 터부시하는 성교육, 대중의 인식 등 많은 부문을 고쳐야 한다.
임신중절 '주수 제한'은 어떻게?
그간 낙태죄 폐지 시위 및 담론을 이끌었던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모낙폐)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난 다음 날인 12일 서울 마포구의 성폭력상담소에서 헌재 결정 이후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이날 기자간담회에서는 임신 주수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임신중절을 12주와 22주 중 어느 쪽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헌재의 유남석, 서기석, 이선애, 이영진 재판관의 헌법불합치 의견은 다음과 같다.
"태아가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인 임신 22주 내외에 도달하기 전이면서 동시에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는 시기까지의 낙태에 대해서는 국가가 생명보호의 수단 및 정도를 달리 정할 수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모낙폐는 "우리는 어떤 주수 제한도 처벌을 하지 않을 것을 주장한다"며 "입법자들은 특정한 주수를 우선적 기준으로 검토하는 구시대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여성의 임신중지 결정권이 임신 전 기간에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지에 대한 헌재의 의견을 존중하는 입법적 방향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영 모낙폐 공동집행위원장은 "마치 전면적으로 임신중절이 허용되면 출산 하루 전에도 낙태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되고 있는데 의료적으로 맞지 않다"고 지적하며 "임신 후기로 갈수록 여성의 몸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이 판단에서 중요한 건 여성의 건강과 생명이라는 걸 강조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런 경우 입양 등도 고려될 수 있는데, 현재 입양 정책 등도 문제가 많아 점검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 ▲ 12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열린 헌재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입장문 발표 간담회에서 나영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이 입장문을 읽고 있다. 위원장 오른쪽으로 문설희 공동집행위원장, 제이 공동집행위원장, 류민희 낙태죄위헌소송 공동대리인단 변호사, 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 | ⓒ 연합뉴스 | 관련사진보기 |
"의료인 임신중절 교육하고 유산 유도약 '미프진' 도입해야"
모낙폐는 의료 부문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빠른 시기에 어디서나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도록 유산유도제의 도입을 즉각 승인하고 정확한 정보 제공과 임신중지 전후 건강관리를 보장하라"며 "누구나 어디에서든 피임, 임신 임시중지, 출산에 관련된 안전한 정보를 얻고 상담할 수 있는 체계적 시스템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산부인과 전문의 오정원씨는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먼저 안전한 임신중절을 위해서는 의료인 및 예비 의료인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며 "이 교육을 대학 병원과 공공의료기관에서 제공해 수련의들이 임신중절수술에 대한 경험을 쌓은 뒤 배출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유산유도약인 '미프진'에 대해서는 "전면 도입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낙태죄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제약회사 등에서 미프진 등 유산유도약을 따로 수입하지 못했지만 이번 결정으로 식약처의 허가를 받는다면 미프진을 도입할 수 있게 됐다. 오정원씨는 "미프진은 임신주수에 따라 9주 이전에는 자가로 집에서 복용할 수 있다고 가이드라인이 나와 있다"고 설명했다.
"변화된 '성교육' 필요"
한편 헌재 결정을 앞둔 11일 오전 헌법재판소 앞에서는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청소년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제대로 된 성교육을 학교에서 실시하라"고 외쳤다. 임신중지를 선택한 한 청소년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성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여학생들만 낙태하는 영상을 봤고, 짧은 옷을 입지 않고 늦은 시간에 이성과 단둘이 있지 말라고 교육 받았다"며 "청소년 역시 성적 욕망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는 포괄적이고 실질적인 성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자회견에 참여한 한 여성단체 활동가 역시 "10대 시절 말도 안 되는 성교육을 받았다"며 "이성교제를 웬만하면 하지 마라, 너네(여학생) 손해다, 몸가짐 조심해야 한다, 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었다"며 '업데이트'된 성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초등성평등연구회의 한 교사는 11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 통화에서 "학교에 물론 성교육 시간이 있긴 하지만 요즘 학부모나 보호자들은 성교육에 대한 요구나 필요를 많이 느껴 삼삼오오 모여 과외처럼 강사를 섭외해 성교육을 한다더라"라고 전하면서 안타까워했다.
이 교사는 "교사들이 계속 이야기하는 것 중 하나가 '성교육 표준안'이다. 이 기준에 따라 성교육을 하라고 나온 안인데 굉장히 구시대적인 내용이 많이 있다"라며 "일단 이 성교육 표준안을 폐지하거나 수정하고 더 밝은 곳에서 성교육을 말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낙태죄가 폐지된 만큼 '내 몸은 내 선택이다'라는 자기 결정권을 성교육에서 더 강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라고 언급했다. | ▲ 2017년 8월 30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국가수준의 학교성교육 표준안 폐기를 위한 16,698명 서명 제출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성소수자 배제하고 성차별하는 학교성교육표준안 폐기를 촉구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다. | ⓒ 연합뉴스 | 관련사진보기 |
"'인식 변화'도 국가의 책무"
낙태죄에 대해 다른 법과 역사를 지닌 유럽의 다섯 나라를 방문한 뒤 <유럽낙태여행>(봄알람)을 쓴 이민경 작가는 11일 오후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유럽의 루마니아 사례를 들었다. 루마니아는 차우세스쿠 독재정권이 낙태를 금지시켜 수많은 여성이 낙태 수술을 받다가 사망했고 원치 않은 출산으로 인해 버려지는 아이들의 수도 늘어났다.
현재 루마니아는 여성의 낙태가 합법인 나라가 됐지만 이것이 여권 증진으로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서 낙태율이 높다고 한다. 이 작가는 "낙태율이 높다는 말은 원치 않은 임신이 계속 발생한다는 뜻"이라며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낙태죄 폐지만으로는 보장되지 않는다, 성교육이나 피임 등 제반 여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낙태가 합법화 된다고 다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이 작가는 "낙태죄가 없어지더라도 여성을 향한 도덕적 낙인이 계속 있을 수 있다"며 "프랑스 역시 낙태하는 여성에 대한 낙인이 계속 있는 국가"라고 우려를 표했다.
12일 기자회견에서도 모낙폐 활동가 제이는 "어제(11일) 굉장히 의미 있는 결정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임신중절에 대해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며 "이러한 사회적 낙인과 차별을 해소하는 것까지 국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렇듯 인식의 변화까지 아직 남겨진 과제가 많다. 당장 헌법불합치 결정이 났지만 여성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이 계속 관심을 갖고 낙태'죄'의 완전 소멸을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출처]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27913&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