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도 性차별하나]②원치 않는 성관계, 증거 없어도 처벌 길 열릴까
안희정(53) 전 충남지사가 ‘비서 성폭행’ 혐의에 대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이후 여성계를 중심으로 ‘비동의 간음죄’를 신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드러냈는데도 성관계가 이뤄졌다면 이는 성폭행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원칙, 이른바 ‘노 민스 노(No means no)’ 룰을 법 규정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안 전 지사 사건의 1심 재판부도 "비동의 간음 처벌 규정이 입법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안 전 지사를 처벌하기는 어렵다"고 판시했다.
비동의 간음죄는 폭행과 협박 등 물리력이 있어야 성립하는 ‘강간죄(형법 297조)’와 달리 직장 상사나 고용주가 위력·위계를 이용해 성폭행하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형법 303조)’처럼 뚜렷한 증거가 없는 경우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장애인이나 미성년자가 아니면 위력을 인정받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비동의 간음죄 입법 논란은 올 초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과 함께 이미 불거졌다. UN여성차별철폐위원회도 지난 3월 우리나라에 ‘피해자의 자발적 동의 없이 이뤄졌는가’를 기준으로 강간죄를 판단하라며 법 개정을 권고했다. 영국과 미국, 독일 등 해외 선진국에선 비동의 간음죄를 법으로 규정해 동의 없는 성관계를 처벌하고 있다.
‘세계적 추세’이니 이 법을 도입하면 ‘법이 남자편’이라는 주장도 줄어들지 않을까? 그러나 문제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게 법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리나라 법 체계에 맞지 않을뿐더러, 동의 여부를 입증하는 것이 쉽지 않아 사실상 유명무실한 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법에 대해 찬성과 반대 입장을 가진 두 전문가의 논리를 들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박선영 박사와 형사정책연구원의 김한균 박사 이야기다.
◇입법 공백인가…"한국 강간죄 너무 엄격" vs. "이미 다 갖췄다, 적용의 문제" 박선영 박사는 우리나라에서 비동의 간음을 처벌할 규정이 없는 것이 ‘법의 공백’이라고 했다. 그는 "비동의 간음죄 처벌은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현행 법체계에서는 강간죄를 입증한다는 것이 매우 엄격합니다. 명백한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다는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피해자들은 성폭행을 당하고도 무고죄가 두려워 나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형법은 강간범을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법원은 이를 ‘피해자의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또는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수준’이어야 한다고 해석하는 ‘최협의(最狹義)설’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최협의설’은 반항이 불가능한 수준이 아닌 단순 폭행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강간죄를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광의(廣義)설과 대비되는 개념이죠. 가장 좁게 보는 겁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강간죄의 최협의설을 충족하는 경우는 피해 사례 10건 중 1건에 불과합니다."
"비동의 간음죄 신설은 성폭력범죄에 폭행과 협박을 요구하던 기존 방식을 탈피해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비동의 간음죄를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면 김한균 박사는 "지금처럼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폭행과 협박을 좁게 이해해 생기는 문제는 공감한다"면서도 "하지만 비동의 간음죄를 만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영국은 2003년 성범죄 관련 법을 전면 개정하면서 비동의 간음죄를 도입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은 별로 실익이 없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도 비동의 자체만으로 처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판례를 보면 비동의 간음죄를 인정한 때는 피해자가 약물에 취했다거나, 미성년자였다거나, 가해자를 남편으로 착각한 경우 등입니다. 이런 경우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처벌받고 있는 경우죠."
"위력, 위계, 준강간, 미성년자 성폭행 등 우리 법이 결코 부족한 게 아닙니다. UN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 강간죄를 인정하고 있는 우리 법’을 비난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처럼 강간죄를 세분화해서 처벌하는 데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랬을 겁니다. 결국 법 해석의 문제입니다. 국민은 지금 (성폭력 관련)법이 없다고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법을 적용하는 경찰과 검찰, 법원에게 불만이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비동의 입증은 어떻게 하나 비동의 간음죄 입법론자들은 ‘현행법을 제대로 적용해도 사각지대가 생기므로 비동의 간음죄를 명문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폭행이나 협박, 위력 등이 없더라도 피해자 의사에 반해 이뤄진 성관계라면 형사처벌로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동의 여부를 어떻게 입증하는가의 문제가 생긴다.
박선영 박사의 주장은 이렇다. "비동의 간음과 같은 성범죄는 둘만의 공간에서 비밀리에 이뤄지기 때문에 물증을 내놓기 어렵습니다. 결국 양측 주장과 관련된 문맥과 정황을 따져봐야 합니다. 피해자가 사건 후 어떤 태도를 취하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등을 합리적이고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사실인지, 꾸며낸 이야기인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실제 적용의 어려움은 있을 수 있겠지만 판례나 수사기법 등이 발전해 나간다면 미국처럼 정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폭행과 협박의 정도를 완화해서 해석하도록 법을 개선하거나, 아니면 기존 강간죄를 비동의 간음죄로 대체하고 행위(폭행, 협박 등)의 정도에 따라 법정형을 가중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반면 김한균 박사는 "말처럼 쉽지가 않다"고 했다. "폭행죄라면 옷이 찢어졌다든지 하는 증거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폭력의 경우 동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법원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말이 좋아 ‘노 민스 노’입니다. 형사소송에서 ‘노’가 ‘노’로 인정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일방의 주장만으로는 동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인정되기 어렵습니다. 지난 7월부터 비동의 간음죄 처벌 규정이 시행된 스웨덴 사례를 볼까요. 아직 시행 한 달밖에 안 됐지만 스웨덴 변호사협회는 ‘입증이 어렵기 때문에 비동의 간음죄의 실효성은 크게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동의 간음죄가 입법되면 위력에 의한 간음 사건에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스웨덴의 비동의 간음죄는 말로써 동의 의사를 표현했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판단됩니다. 반대로 상급자가 부하 직원에게 위력을 행사해 (성관계에 대해) 동의를 받는 방식으로 악용될 수 있습니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비동의 간음으로 보호할 영역인가
비동의 간음죄 법률을 만드는 것이 여성의 성적 자유와 성적 자기결정권에 과연 도움이 되는가에 대해서도 두 사람 의견은 엇갈렸다. 김한균 박사의 주장이다. "일각에서는 비동의 간음죄를 입법화하는 것이 오히려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본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성적 자기결정권이란 성관계의 상대방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인데, 폭행·협박이 없는 상황까지 규율하는 것은 ‘여성은 스스로 성관계 요구를 거부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강압없이 이뤄진 성인 간 성관계까지 법으로 처벌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형법은 국가가 개인에게 행사하는 일종의 ‘폭력’으로, 대안이 없을 때 쓰는 최후의 수단이 돼야 합니다. 비동의 간음은 국가가 사적(私的) 영역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입니다."
박선영 박사의 생각은 다르다. "반드시
폭행·협박이나 위력을 사용한 경우가 아니라도 피해자 의사에 반해 성관계가 이뤄진다면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겁니다. 여성을 수동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여성의 적극적인 의사 표시에 따라 성관계가 이뤄져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규정 자체로 여성의 지위가 낮아진다거나, 여성에게 불리하다고 폄하하는 것은 상당한 편견이고, 본말이 전도된 표현입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30/201808300355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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